국가지정문화재 보물 ‘불조삼경’
문화재청 제2023-031호 (2023년 8월 24일 지정)
‧ 명 칭 : 불조삼경(佛祖三經)
‧ 소유자(관리자) : 대한불교조계종 석왕사
‧ 소 재 지 :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소사로 367, 석왕사
‧ 수 량 : 1책(합철본, 41장)
‧ 규 격 : 24.9×17.7cm(半郭: 20.0×14.9㎝)
‧ 재 질 : 저지(楮紙)
‧ 판 종 : 목판본
‧ 형 식 : 선장(線裝)
‧ 조성연대 : 1361년(공민왕 10)
‘불조삼경’은 중국 원나라 고승인 몽산(蒙山) 덕이(德異, 1231~1308)가 석가(釋迦)와 조사(祖師)가 설법(說法)한 3가지의 경전을 결집한 불서(佛書)이다. 즉, 불조삼경의 불조(佛祖)는 부처와 조사를, 그리고 ‘삼경(三經)’은 세 가지 경전을 말한다. 최초의 한역 경전으로 석가가 성도(成道)한 뒤에 처음으로 설법한 내용인 『불설사십이장경(佛說四十二章經)』, 석가가 열반에 들기 전 남긴 마지막 설법 내용인 『불유교경(佛遺敎經)』, 위앙종의 창시자인 당나라 고승 위산(潙山) 영우(靈祐, 771~853) 조사의 어록인 『위산경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불교의 교훈적 가르침을 쉽게 설명하고 있어 불교 경전을 처음 접하는 초학자에게 크게 도움을 주는 경전으로 알려져 있다. 몽산이 서문을 남기고 편찬한 불조삼경은 한국에만 전하고, 현재 전해지는 대부분의 불조삼경도 몽산본의 계통을 잇고 있다.
석왕사 소장의 ‘불조삼경’의 경우 『불설사십이장경』은 후한(後漢)때 인도의 승려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이 한역(漢譯)한 것이고, 『불교유경』은 후진의 구마라집(鳩摩羅什)이 한역한 것이며, 『위산경책』은 위산 영우의 어록으로 3종 모두 송나라의 수수(守遂)가 주석(註釋)한 것이다. 이 책은 1286년에 몽산 덕이가 지은 「서(叙)」(2장)와 『불설사십이장경』(12장), 송나라 진종(眞倧)의 「대송진종황제주유교경서(大宋眞宗皇帝注遺敎經序)」(1장)와 『위산경책』및「간행질(刊行秩」(12장)로 구성되어 있다.
석왕사 소장의 ‘불조삼경’은 원나라 판본을 저본으로 1361년(공민왕10) 전주의 원암사(圓嵓寺)에서 번각한 목판본이다. 권말에 간기(刊記)와 유판처(留板處) 기록이 있어 비구 행심(行心)이 발원하고 법공(法空)이 간행의 책임을 맡아 윤선(尹善)등의 도움으로 간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불조삼경’의 고려시대 판본은 현재 3종만이 알려져 있다. 시기적으로 가장 앞선 1341년(충혜왕 복위2)의 정각사 판본, 1361년(공민왕 10)에 전주 원암사에서 간행된 판본 및 1384년(우왕 10)에 간행된 판본이 현존하고 있다. 하지만 이 중 한 권은 권 머리에 몽산 덕이의 서문 첫째장이 결락되었고, 다른 한 권은 권수와 권말에 일부 훼손되어 있어 전체를 배접 수리하였고, 문화재위원회 회의록에 3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석왕사의 ‘불조삼경’은 41장 모두 깨끗하게 보존되었을 뿐 아니라, 인쇄상태나 보존상태도 모두 양호한 판본으로 국가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하여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또 본문 중에는 목서로 구결이 기입되어 있어 당시 국어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
석왕사에서 『불조삼경』을 소장하게 된 것은 석왕사를 창건한 고산대선사의 공이 크다. 불교경전을 연구하여 후학들에게 가르치는 어른을 대강백이라고 하는데, 고산대선사께서는 초대 명진학교 교장을 지낸 박한영 대강백-강고봉 대강백을 잇고 후학을 양성하신 조계종단의 몇 안되는 어른이다. 불조삼경은 석왕사 창건주이신 고산 대강백께서 70여년 전부터 소장하였던 것을 입적하기 전 기증하였다.
경기도유형문화재 ‘목조관음보살좌상’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04호 (2007년 9월 3일 지정)
석왕사목조관음보살좌상은 조선 후기 중소형 보살상이다. 보살상의 크기는 높이가 48cm 무릎의 폭이 31cm이다. 보살상은 화려하게 장식된 커다란 보관(寶冠)을 쓰고, 약간 상체를 앞으로 내밀어 구부정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보관 중앙에는 화려한 화염문과 화문이 장식되어 있다. 보살상은 타원형의 얼굴에 눈꼬리가 약간 위로 올라간 반쯤 뜬 눈과 원통형의 코, 그리고 살짝 미소를 머금은 입이 특징적이다. 수인은 목조로 된 손을 손목에 끼워 넣었으며, 오른손은 첫째와 셋째 손가락을 둥글게 맞댄 아미타수인을 취하고 있다.
바깥쪽에 걸친 대의는 변형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오른쪽 어깨에 대의자락이 가슴까지 내려와 물방울 같이 U자형을 이루고, 나머지 대의자락은 팔꿈치와 복부를 지나 왼쪽어깨로 넘어가고, 반대쪽 대의자락은 왼쪽 어깨를 완전히 덮고 내려와 복부에서 편삼과 자연스럽게 접혀있다. 보살상의 뒷면은 목 주위에 대의 끝단을 두르고 왼쪽 어깨에 앞에서 넘어온 오른쪽 대의 끝자락이 엉덩이까지 늘어져 있는데, 회암사 목조여래좌상의 뒷면의 옷주름보다 더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늘어져 있다.
석왕사목조관음보살상에서 후령통과 발원문 2장이 발견되었는데 이 발원문을 통해 보살상의 제작과 개금 및 중수 내용을 알 수 있다. 발원문에 의하면 관음상은 1755년 4월 용화암에 봉안하기 위해 금어(金魚) 상정(尙淨), 칭숙(稱淑), 화사(畵師) 색민(色敏), 정인(定印), 보심(普心)이 제작하였다. 특히 조각승과 불화승이 공동으로 불상을 제작한 것은 이전 시기에는 매우 드문 일로 18세기 중반부터 불화승들이 불상의 개금과 조성에 서서히 참여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귀중한 불상이다.